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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 대청천문화회 소식/옛길탐방분과

대청천문화회 옛길탐방분과 3월17일(토)밀양시"만어사"일원 첫탐방 및 탐방제

대청천문화회 옛길탐방분과

옛길탐방분과 3월17일(토)밀양시"만어사"일원 첫탐방 및 탐방제

  • 옛길탐방 기고문 (차재문)

  • 역사란 무엇인가
    가야 사람들은 누군인가
    싯다르타의 고통의 바다는 만어사와
    무슨 연관이 있는가
    스스로에게 이 질문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이번 답사길의 첫 발걸음도 박제된 눈으로 역사를 바라볼 것이며,
    깊은 울림의 소리를 만들지 못하고 천오백년 전 가야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만어사 경내에 꽃샘바람이 스친다
    하늘 향해 잠자고 있는 나무에게 봄 햇살 한줌이 서늘하게 비춘다
    김우락 답사대장이 둔탁한 죽비를 들고 천오백년 동안 쉬이 잠들지 못하는 만어사를 깨울려고 고통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싯타르타의 인생사처럼 답사대장의 죽비소리에 놀란 수천 수만의 물고기들이 만어사 경내로 튀어 오른다
    오래된 나무의 그 쓸쓸한 눈처럼
    천오백년 동안 부유하는 빈 여백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답사대장의 고통의 바다는 깊고 아득하다


    '삼국유사' '탑상' 편은 말 그대로 탑이나 불상 같은 인위적인 조형물에 대한 기록이지만 드물게 어산불영 (魚山佛影)은 자연에 대한 기록이다 '파사석탑'과 더불어 '어산불영'은 가야에 얽힌 이야기이다. 어산 (魚山), 즉 '물고기 산'이란 현재 밀양에 돌이 많은 만어산을 말하는 것인데 돌들이 마치 물고기떼가 강물에서 튀어오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어산의 전설은 가야의 수로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답사 전단지 안내 글을 옮김 )


    어산불영 (魚山佛影)의 노래

    나는 그대가 돌속에 감겨 있는 부처님의 그림자를 비추지 못하는 것은 무량수의 별들이 억겁의 시간속에 잠겨있기 때문인 것을 안다
    나는 땅을 헤집고 나온 그대에게 말한다
    그대 검은 돌들은 아름다워서는 안 된다
    돌아봐라,
    가락국은 열반의 땅이 아니다는 것을
    그대 고독한 심장은 그대의 영혼속에
    촘촘하게 다가와 찰나의 순간에
    부서진다는 사실을
    그렇다,
    532년, 금관가야는 신라에 항복했다
    그대 검은 돌의 바같에서는 불국토의
    염원이 흔들리는 추처럼 그대를 흔든다
    너의 상심한 눈빛은 늘 그대가 산란하고 분산되면서 다가온다는 것을 안다
    나는 눈을 감고 그대를 안아주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봄이 왔다고''
    ''봄이 왔어''
    봄은 늘 봄속에서 꽃을 피우고
    검은 돌은 늘 검은 돌속에서 화음을 만든다는 것을


    삼국유사에 의하면 만어사는 1181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삼층석탑 뒷편의 넓은 터가 원래의 법당자리인 것으로 조사되어, 탑은 만어사가 세워질 당시의 위치에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현재의 위치는 법당을 옮긴 것이다...
    [ 대웅전 안내표지판 글을 옮김 ]

    대웅전의 대웅은 부처의 덕호 이다
    그게 본 뜻이라면 불교의 세계관은 평등과 개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어사 대웅전 내 수미단에 앉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정면의 검은돌 무늬를 직조하고 있다
    사찰 경내 바같에는 거대한 돌 '너덜지대'가 있고, 그 검은 돌들은 쇠종소리를 내면서 가락국의 캄캄한 물음들을 들고 대웅전 법당으로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다
    이 검은돌 물고기떼들은 금새라도 이 물음들에 대한 답을 내놓지 않으면 허왕옥 왕비를 모시고 아유타국으로 돌아간다고 아우성의 함성을 지른다
    이 만어사 대웅전 앞에서 가락국을, 수로왕과 허왕옥왕비를 떠올리면서 섬광처럼 스치는 것은 혼돈의 강물에 가야를 맡기고 극한의 상상으로 질문하면서 따라가 보는 것이다
    금관가야를 맹주로 한 가야의 연맹체 국가들은 본디 개방과 교류의 인식세계가 불교의 세계관과 아주 가깝다는 것은, 가야와 왜와 백제와 불교는 동시대 지배계층과 토착세력이 밀착되고 융합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것 아닐까
    자비광대한 부처님이 지혜의 빛을 발하고 있다면, 대웅전 앞 마당에서 사변의 강물에 횝쓸려가는 나의 남루한 행색에도 부처님의 자비가 있기를 빌어 본다


    나는 오늘 만어사 경내에서 귀를 쫑긋세워 소리를 만든것이 누구인가를 찾고 있지만,
    정말이지 이 번다한 세속에서 살아서 그런지 어떻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어쩜 산능선에서 다시 산 능선을 넘어가면서 수신호로 윙윙거리는 전신주의 탁한 소리도 있을 텐데, 맑은 마음 접은지 오래라 그런가 보다
    그러면서 온몸을 얼음장처럼 만들어 필사적 사투로 귀를 열어 소리를 들어니 종각의 맑은 종소리 들리지 않고, 저 수많은 너덜지대의 물고기떼들이 아침나절 둥둥둥 북소리 울리며 가락국 깊은 골짜기 만어사로 밀려오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아마도 일연스님도 오늘 나처럼 환청에 시달리면서 가락국의 환영을 보았을 것이다
    언제나 상상한다는 것은 언어로 빚어내는 것이 아니라 소리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만어사를 떠날 것이고 종각은 기억속에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환청이 없는 무미한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꽃대를 밀어올린 봄꽃이 성큼성큼 걸어와 고개를 내미는 것만 보일 것이다
    아니 그때쯤 가락국의 소리는 가장 먼 곳으로 부터 다가와 다시 가장 먼곳으로 떠날 것이다
    마침내 이 종각이 만어사에서 더 이상 소리를 만들지 않는다는것!
    그것이 두럽다


    샘물 한 바가지를 마신다는 것은
    바같을 살아온 중생이 안을 들어다 본다는 것
    눈을 뜨니 대웅전이 보인다는 것은
    주변부에서 살아온 중생이
    그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


    만어사 3층 석탑은 보물 제 466호. 높이 3.7미터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만어사는 1,181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탑의 기단부는 고려시대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층기단으로, 기단이나 몸돌은 비교적 완전하나, 상륜부는 없어젔다 후대에 별개의 석재를 다듬어 보주를 얹어 상륜부를 대신하고 있다 신라시대 석탑에 비해 조형미는 다소 떨어지는 감은 있으나, 전체적으로 균형과 안정적인 비례를 보여주는 우수한 작품이다
    [ 3층 석탑 안내표지판 글을 옮김 ]

    '탑'이란 말은 인도에서 무덤을 이르는 말인 '스투파'가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탑파'로 되고, 줄여서 탑이 된 것이라 한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그의 제자들은 사회풍속에 따라 그의 유해를 다비하였다
    이 탑을 만든 석공들과 미천한 중생들, 그 인연에 스치는 모든 자연현상의 대상들이 열반의 땅에서 진짜 나를 찾아보는 것이 이 3층석탑이 지니는 위엄일 것이다
    사람들이 단지 탑돌이를 하면서 무병장수를 빌고 세속의 성공만 빈다면, 명리에 물들면서
    적묵의 깊은 마음을 적시지 못할 것이다
    여기 만어사 3층 석탑과 원래 있던 대웅전은 수평을 이루는데, 옆으로 옮긴 대웅전은 비스듬한 대칭을 하면서 그 연유를 말하지 않고 표기하지 않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존재이면서, 태어나 영원히 살 수 없는 존재이기에 평등하다고 직설로 설파한다면 만어사 3층 석탑과 대웅전 역시 평등의 지렛대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만어사 경내에는 기호로 알 수 없는 문양을 새긴 돌 비석 하나가 있다
    마치 태양신을 숭배하는 잉카인들의 암호화한 기호를 보는 것 같아 나도 오랫동안 이 돌 비석을 바라보았다
    겨울 설한풍에 생존을 위해 나무속에 몸을 숨긴 나무의 연륜 (나이테의 눈) 들이 점점히 자라나 어느새 봄날이 왔다고 수액을 물레질하고 꽃을 피우고 잎을 내듯이 나도 이 문양의 암호를 가공과 상상의 만남으로 풀어낸다면 한 평생 내가 꿈꾸어왔던 사색의 집대성을 완성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망각을 끄집어내고 만감을 끌어올리고 교감을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늘 유물과 기록은 전문역사학자의 몫이고, 상상하면서 역사를 관조하는 것은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몫이 되기를 염원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의 역사는 늘 각자 고유의 색깔로 만들어 가듯이, 나는 나의 어줍잖은 색깔로 역사의 바다로 노를 젖고 싶은 사공이 되고 싶어 했다
    나는 내가 이 문양의 기호를 상상한 결론은 이렇다
    만어사 (萬魚사)는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 (首露王)이 창건했다는 전설속의 사찰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 사찰이다
    그 연유는, 수로왕은 철을 생산하는 국가에서 유민을 이끌고 가야로 망명한 지배계층인 점. 허왕옥 왕비 역시 인도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온 점을 유심히 들어다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초기 가락국 이전에는 분명히 자연이 인간을 지배하는 무교 (巫敎) 신앙이 번성했을 것이다
    즉 무교신앙의 본질은 스스로 하늘의 자손임을 자처하는 지배자의 권위가 있다
    김수로왕이 기존의 지배계층에 대항하기 위해 불교를 들고 나온 것은 중앙국가의 새로운 지배이념이 필요했고, 토착민에게는 평등사상으로 통치이념을 정립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최고의 무기는 가장 강한 임팩트로 당대 통념의 사회질서와 구성을 뿌리채 뽑고 흔드는것 아닐까
    만어사 돌문양 비석은 김수로와 옥지 (玉池), 나찰녀와 독용 (毒龍)등의 전설과 설화가 차고 넘치는 비밀의 문을 열고 새긴 것이다


    [ 만어사에서 삼국유사를 만나다 ]
    이번 답사의 첫 기행지 제목이다
    일연은 누구인가
    일연은 승려이자 학자이기 이전에 동시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사상가가 아닐까
    일연이 제시한 동시대 역사를, 스스로 역사를 삶의 일부로 바라본다는 것은 아웃사이드가 지니는 반골의 기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승려 일연은 불교가 통치기반인 고려에서 여러 관직을 지냈지만 그는 천상 민중과 함께하고 시대를 고민한 큰 스승이었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당대의 고려는 거란침입. 묘청의난. 최씨무신정변. 몽골의침입 등 한국역사에 있어 가장 격황의 시대였지 않을까
    한 인간이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역동적인 눈으로 역사에 접근한다는 것은, 지배와 저항의 보편적 역사흐름에 치열했다는 것 아닐까
    어느듯 해가 중천에 걸려 있다
    만어사 답사길은 내몸이 젖어가야만 마당에 서 있는 두껍고 쓸쓸한 나무의 번뇌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경상남도 밀양시 삼량진읍 검세리는 예로부터 영남지방의 동. 서와 남북의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 작원관이 있던 곳이다
    이 곳은 여행하는 관원의 숙박소 기능과 왜적의 공격에 방어하는 기능, 작원진이라는 나루터로 출입하는 사람들과 화물을 검문하는 기능을 하였다. 즉 원(院), 관(關), 진(津)의 역할을 겸한 곳이었으며,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다
    임진왜란 때는 밀양부사 박진 장군이 몰려오는 왜적을 맞아 결사적으로 항전을 펼친 곳으로도 유명하다
    [답사 전단지 안내글을 옮김]

    답사 두번째 기행지로 밀양시 삼량진읍에 있는 작원관 (鵲院關)을 둘려보았다
    여기서 금년도 답사길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탐방제를 올리고 김밥으로 점심을 먹는다
    첫번째 만어사 답사길은 상상의 내적 힘을 모았다면, 지금 두번째 답사길은 오금이 지리도록 긴장의 눈으로 직시해야 될 것 같아 마음 다잡고 날선 역사의 현장으을 들어가 본다
    조선의 개국 200년 후, 1592년 동아시아 국제전인 조.일전쟁이 일어났다
    (※ 임진년에 왜가 조선에서 난을 일으켰다는 '임진왜란'의 표기는 잘 못 되었다. 이 전쟁은 조선과 일본의 국가간의 전쟁이었고, 명이 개입한 동아시아 전쟁이었다. 전쟁이후 선조를 비롯한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전쟁의 패배와 참화를 백성에게 전가시키고, 그 책임을 회피하고 떠넘기기 위해 조일전쟁을 임진왜란으로 축소하고 폄하시켰다. 그러면서 명에대한 '재조지은'의 은혜와 '소중화'의 협소한 물줄기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갔다는것, 이것이 조선의 가혹한 운명이었고 200만명의 죽임을 당한 조선백성이 피눈물이었다
    ...격한 마음이 출렁이는 것을 진정시키면서 글을 줄이고 물한잔을 마신다)
    일본의 조선침략으로 첫번째로 부산진과 동래성이 무너지고 고니시 유키타가 (소서행장)가 1만8천여 대병럭을 이끌고 물금에서 밀양으로 진격하였다
    밀양부사 박진이 이끄는 300여 병력은 일본군을 맞아 사력을 다했지만 패배하였다
    낙동강은 유구하게 흘려가지만 박진의 병사들과 백성들은 낙동강에 피를 적시며 수장되었다
    낙동강은 태초부터 그 근원의 모태로 영남의 젖줄이 되어 남해바다로 향한다
    그 처참한 고통과 질곡의 역사는, 조선백성이 감당할 몫이라면 역사는 도도하게 흘러갈 수 많은 없지 않는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7년간의 조. 일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전쟁의 참상으로 전 국토가 유린되었고, 일본은 '세키가하라' 전투,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을 멸문시키고 승리하여 도쿠가와 막부시대가 열렸다
    256년간 지속된 도쿠가와 막부시대는 일본역사상 가장 안정되고 평화로웠던 시기이며, 이 시기에 독특한 일본문화가 발달하고 꽃을 피웠다
    일본에게 있어 조. 일 전쟁은 조선의 수많은 선진문화와 문물을 약탁한 그 댓가로 도쿠가와 막부시대를 지탱한 원천을 가져다 준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금관가야로 부터 철을 가져가 왜의 '야마토'국가를 발전시킨 동력이 되었다
    오늘 작원관을 둘러보면서 일본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아니라, 그 고통을 질긴 생명줄처럼 감내하면서 물러서지 않는 결기로 역사의 반면교사로 삼는 것이다
    이제 몇일 지나면 개나리꽃이 흐드러지게 필 것이다


    작원관 앞 넓은 정원에서 탐방제를 올린다
    낙동강이 흐르고 그 가장자리에 샛길이 있고 그 길따라 자전거가 지나간다
    봄이 왔는지 강바람은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산쪽으로 다가오면서 꽃봉오리를 툭 치면서 흔든다
    제를 올리는 정면 산 중턱에는 작원관 위령비가 있다
    조 일전쟁에서 산화해간 이름모를 병사와 백성들에게도 마음속 위로와 안식의 평화를 기원해 본다
    이땅은 어디에서나 우리가 누울 곳이다
    여기 작원관 공원처럼 산책하기 좋은 봄날이 내 누울 곳이라 우긴다면, 그는 봄은 어디서 오는가를 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오늘 탐방제는 금년한해 답사길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면서 아주 오래전 가야 사람들에게 술한잔 올리는 자리이다
    봄날이 오면 꽃이 피고 꽃을 피운다고 좋아라 말한후, 정직하게 나무에게 물어보자
    연초록 잎을 내기 위해 봄날이 오면 저 검은 그루터기에서 삭신의 아픔을 견디며 옴을 내야한다고 나무가 처연하게 말한다
    봄은 그렇게 검은땅에서 운명처럼 살아가는 나무를 비켜갈 수 없는 것이다
    가야의 역사가, 그 수많은 야사의 꽃들이 지천에 살아있어도 정사의 매듭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검은 그루터기에서 움을 만들어야 하는 봄날의 나무가 처한 운명을 알지 못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오늘 탐방제를 올리면서 하늘과 땅과 사람과 자연이 서로를 존중하며 공감하고, 공동체의 높은 영감들이 서로에게 스며들기를 기원해 본다



    오늘 작원관에서 두번째 답사길을 마무리한다
    노오란 산수유 꽃이 답사객의 젖은 땀을 말린다

    산수유 나무에 대한 소고
    산수유 나무는 철저하게 땅위에서 살았다
    저 나무는 혼자인것과 혼자여여 하는, 인고의 시간을 치열함으로 버티며 살아왔다
    누구에게나 손짓으로 소리로 신호를 보내야 하는 운명보다, 언제나 혼자여야 한다는 다짐이 나무에게는 더 아픈법이다
    치열함은 언제나 단순성을 지니고 있다
    저 나무의 쓸쓸함은 나무밖의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언제나 나무자신에게 봄날의 잔등을 내 보일 때이다
    봄날에 상심의 마음을 내 주고 아파본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아픔에 치유의 약이 있는지..
    작원관은 언제나 봄날을 비켜 갈 것이라고
    나무가 나무에게, 나무의 바같에서 여름이 오고 있다면서 말한다



    가야국 제2대 거등왕 (居登王)이 부왕인 수로왕 (首露王)의 은혜를 기리기 위하여 200년 무렵에 세웠다는 가야 고찰이다. 임진왜란때 소실되었으나 1860년 (철종 11년)에 동화사 승려 학송이 옛 부은사지에 재건하였다고 전한다. 오래도록 부은암 (父恩庵)으로 불렀으나 근래에 부은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부은암 뒤 폭포의 바위에 통천도장
    (通天道場)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통천이라는 글은 가야불교의 절터에서만 나오는데 신어산 은하사에 올라 가다보면 종각 옆 바위에 새겨진 신어통천과 무척산 정상에 통천사와 같은 맥략의 의미로 가야불교를 조명할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기도 하다.
    (답사 전단지 안내 글을 옮김)

    오늘 세번째 답사길인 부은사 가는길은 머릿속이 우주처럼 비어있기를 염원했는데,
    가야국의 모든걸 담을려는 어리석은 집착에 머리가 핑핑돌고 있다
    명색이 답사여정을 글로써 담을려면 그 처음의 생각을 끝까지 끌고 가야하는 내적 힘을 비축해야 하는데 오직 나의 협량함을 탓할 뿐이다
    답사글 하나를 만들려면 수많은 글들을 만들고 지워야 하는데 펜의 힘이 세속의 힘에 패배했다고 고백을 한다
    마틴 루터의 최고의 무기는 당대 로마교황청의 속박에 저항하면서 지칠줄 모르고 써내려간 글이었다
    라틴어를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시장의 민중언어로 써나간 루터야말로 독일문학.역사. 철학의 주춧돌이 되었다
    나는 늘 루터의 인식혁명이 변방의 독일을 깨웠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다
    다음달 답사길은 나에게 더 많은 절박함이 몰려와 나의 내재적가치 까지도 답사글에 담기기를 바란다
    나는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더구나 빛나는 글을 묘사 하는 것은 글 너머에 존재하는 진경의 거울을 버리는것이라 늘 경계하면서 살아왔다
    어줍잖은 나의 글이 초심의 글처럼 살아있기를 바란다면 언제나 삶의 순례자처럼 새로운 고행앞에 물러서지 않고 온 몸으로 설한풍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각설하고 부은사는 내 머리속을 흔드는 상상이 떨어져 나가 부득이 안내 전단지로 대신한다
    이점 자신에게 부끄럽고 답사회원님들께 미안한 마음 전한다


    양산 원동에서 미나리와 삼겹살로 뒷풀이를 하면서 답사여정을 마무리 한다
    김우락 답사대장님 하선영의원님 이서현위원장님 박영철차장님 그리고 답사회원님들의 노고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꽃은 지역의 문화가 그 지역의 역사와 함께 만들어질때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김우락 대형은 20대초반에 만나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제 인생의 거울이라, 형의 살아가는 모습을 늘 마음 저리며 지켜보고 있습니다 # 작성자 차재문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