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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 대청천문화회 소식/옛길탐방분과

대청천문화회 옛길탐방 그 두번째 이야기

2017년4월22일(토) 옛길탐방 3차 프로젝트
그 두번째 이야기

일시 ;  2017년4월22일 토요일 오전09시~
집결장소 ; 장유2동 주민센터 앞마당
탐방내용 ; (제2화) 장유사와 용제봉을 넘어 불모산으로의 여정
탐방경로 ; 대청천 > 장유사 뒷길 > 용제봉 > 상점령 > 불모산 >  상점마을 > 온돌 채석장터

♧과거로의 힐링여행
대청천문화회 옛길탐방팀 우리는 녹음이 우거지기전 과거 장유사에서 창원 성주신로 넘어가는 산길옆 생태를 공부하고, 채석장 (구들장 터)을 따라 걸어 보았답니다.

이번 탐방의 밋션으로 주어진 용제봉 기우단 옛터 흔적을 찾아 보는 것 이었는데 아쉽게도 샤료와 역사 자료를 찾아보고 좀더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추진 하기로하고 아쉬움을 뒤로하고...
{기우단은 1929년 김해읍지에 기록이 남아 있기에 그 옛날 가뭄에 애타게 비오기를 갈망하는 선조들의 마음을 뒤세겨 보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또한 용제봉에 오르는 길목, 허황후가 머물럿다는
장유사에 대해서 "김우락탐방대장"님의 깊이 있는  해설로 안내 해 주셨습니다.
장유사 입구에 있는 서어나무, 느티나무, 전나무 등 중점 설명과 전직 대통령의 사법고시 를 준비 하던 곳과 장유화상 기적비 채석장 상관례에 있는 당산목 등에 깊이 있는 산길 인문학 답사로 이어졌답니다.

불모산
『조선지도』(창원)의 불모산 일대 구분자연지명 > 산
위치경상남도 > 창원시 > 성산구, 경상남도 > 김해시
경상남도 창원시의 성산구 성주동과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에 걸쳐 위치한 산이다(고도 : 801m). 『여지도서』에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전단산(旃檀山)으로부터 이어진다."라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창원)에는 토산으로 "사철(沙鐵)이 부 남쪽 악상리(岳上里) 부을무산(夫乙無山)에서 난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부을무산이 불모산의 또 다른 이름이고, 악상리는 불모산리 즉 현재 불모산동의 옛 이름으로 여겨진다. 부을무산의 '부을'은 '불'로 서쪽을 뜻하고, '무'는 '뫼'로 산을 뜻하므로 김해의 서쪽에 있는 산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취무산(吹無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취' 자 또한 불, 곧 서쪽을 뜻하므로 부을무산과 그 유래가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부 남쪽 30리 지점에 불모산이 있으며, 철이 산출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창원)에는 성주사가 묘사되어 있으나 현재 불모산의 남쪽에 있는 웅산(熊山)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영남지도』(창원)의 불모산에는 웅신사(熊神寺)가 묘사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읍치 남동쪽으로 약 30여 리 떨어진 곳에 불모산이 묘사되어 있다. 읍치 북쪽의 천주산(天主山)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에 위치하여 북쪽으로 전단산, 남쪽으로 장복산(長福山)과 이어지며 김해와의 경계를 이룬다. 현재 불모산 북쪽에는 신라 때 창건된 성주사가 있다.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비인 허왕후의 일곱 번째 아들이 지금의 불모산에 입산하여 스님이 된 까닭에 허왕후를 불모(佛母)로 여겨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조선지지자료』(마산)에는 불모산리가 상남면에 속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창원시 성산구 성주동에 속한 법정동인 불모산동과 불모산천, 불모산 저수지 등에서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용지봉
경상남도 창원시 불모산동과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에 걸쳐 있는 산.

개설
북쪽으로는 대암산(大岩山)[669m]과 이어지고 남쪽은 상점령(上點嶺)을 지나 불모산(佛母山)[801.7m]과 이어지는 낙남정간의 갈림길이다.
명칭유래
용지봉의 원래 이름은 용제봉(龍祭峰)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 김해도호부 단묘에 “용제봉은 김해도호부의 서쪽 불모산에 있으며, 50리이다. 기우단을 두었다.”고 하였다. 이로써 용제봉은 기우제(祈雨祭)와 관련하여 생성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이와 달리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는 용제산(龍蹄山) 또는 용제봉(龍蹄峰)으로 나온다. 제(祭)가 제(蹄)로 바뀐 배경은 알 수 없다. 이에 대해 주민들은 ‘용제(龍祭)’와 ‘용제(龍蹄)’는 이름처럼 상이한 기원 설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용제(龍祭)는 무제와 관련되고, 용제(龍蹄)는 진례면 무송리 용소의 용 승천설화와 관련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용제봉이 지금의 이름인 용지봉으로 된 것은 자음 변이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자연환경
용지봉의 기반암은 변성퇴적암이며, 정상부와 마루금에는 곳곳에 바위가 드러나 있다. 이곳 산지의 기반을 이루는 변성퇴적암은 풍화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여 산지의 고도가 높고, 경사가 거칠하다. 퇴적암층은 전반적으로 동쪽인 김해 방면으로 기울어져 있어 서쪽인 창원 방면의 경사가 더 급하다.

현황
용지봉은 창원·김해 지역의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대표적인 산행 코스이다. 낙남정간의 줄기가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꺾여 김해로 이르고, 그 기맥은 남쪽으로 불모산-웅산(熊山)[703m]을 거쳐 해안 산지로 이어진다. 정상에는 용지봉이라고 새긴 정상석과 김해에서 세운 용제봉 유래비가 있다. 또한 정상의 동쪽 비탈에는 김해시에서 세운 용지정이란 누각이 있고, 정상에서 남남동 방향으로 약 8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장유암이 있다.

참고문헌
『경상도 읍지(慶尙道邑誌)』
『여지도서(輿地圖書)』
민긍기, 『김해의 지명』(김해 문화원, 2005)
「지질도(1:50,000)」(한국 지질 자원 연구원, 1976)
[네이버 지식백과] 용지봉 [龍池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허황옥신화
정의
가락국(駕洛國)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왕비 허황옥(許黃玉)에 관한 설화.

줄거리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허황옥은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이다. 본국에 있을 때 부모의 꿈에 상제(上帝)가 나타나 “가락국 왕 수로는 하늘이 내려보내 등극케 하였으니 이 사람이야말로 성스러운 사람이다. 새로 나라를 다스리는데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공주를 보내어 짝을 삼게 하라.”라는 명이 내려 공주는 가락국으로 갔다. 이때 가락국에서는 신하들이 수로왕에게 배필이 없는 것을 걱정하였다. 이에 왕은 배필을 정하는 것이 하늘의 명이라며 유천간, 신귀간과 같은 구간(九干)에게 망산도에 가서 공주를 맞아 오게 하였다.

당시 공주는 열여섯 살이었고, 20여 명의 종자와 각종 패물을 가지고 수로왕에게 왔다. 김수로왕이 친히 밖으로 나가 공주를 맞이하여 궁궐로 돌아왔다. 그런데 허 황후가 가락국으로 갈 때 파도가 심하여 부왕은 풍랑을 잠재우는 신통력을 가진 석탑을 싣고 가게 하였다. 이 탑이 파사석탑(婆娑石塔)이다. 파사석탑은 닭의 볏에서 나오는 피를 바르면 흡수하는 성질이 있어서 경상남도 김해 지방의 돌과는 구별된다.

분석

허황옥이 가락국에 올 때 오라버니가 함께 왔는데 이름이 장유화상이다. 경남 김해의 장유면은 그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설화에는 김수로왕과 허황옥 사이에 일곱 아들과 두 딸이 있었다고 하며, 일곱 아들이 장유화상을 따라 수도하여 성불하였다는 설화가 칠불암 배경 설화로 전한다. 두 딸 가운데 하나는 탈해왕과 결혼하였고, 또 한 명은 바다 건너 왜의 여왕이 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장자가 김수로왕의 뒤를 이어 거등왕(居登王)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둘째 아들은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김해 허씨가 되었다.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가 서로 혼인을 꺼리는 풍속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특징

<김수로왕신화>는 시조신화가 갖는 하강 모티프와 도래 모티프가 함께 존재하는 특징이 있다. 허황옥의 도래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에 근거하여 공주의 도래 경로를 추적하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또 KBS 방송국에서 파사석탑과 옛 아유타 지방에서 출토되는 돌의 성분이 서로 일치한다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허황옥신화>는 아유타국이 멸망한 후 그 왕족이 이동하여 허국(許國)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보주(普州)라는 곳에 머물렀으므로, 성씨를 허씨라 부르고 왕후의 시호를 보주태후라 지었음을 알려 준다.

의의

<허황옥신화>는 한국 문화사에서 불교의 유입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왜냐하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 때가 372년(소수림 2)인데, 『삼국유사』에는 허 황후가 불교 국가인 아유타에서 들어온 해가 A.D. 48년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 황후와 장유화상을 기리기 위해 지은 장유사가 있었다는 기록과 설화가 있고, 허 황후와 함께 온 장유화상이 수도하면서 일곱 왕자를 성불시켰다는 <칠불암연기설화> 또한 있다. 허 황후 도래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다면, 이 신화는 우리나라 불교 전래의 역사를 약 300년가량 앞당기는 의의를 갖는다.

집필

김용덕(金容德)/한양대학교

참고문헌

가락국탐사(이종기, 일지사, 1977년)

가락의 설화(남도영, 종교문화사, 1986년)

가야불교설화의 고찰(김용덕, 한국학논집21·22, 한양대학교, 1992년)

가야불교의 고찰(허명철, 종교문화사, 1987년)

내고장 전통(김해군, 1983년)

출처

三國史記

三國遺事

[네이버 지식백과] 허황옥신화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편), 국립민속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