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5차 대청천문화회 옛길 탐방
-2018년 07월 21일(토) 오전 9시~
탐방대장 ; 김우락(김해대학교 왜래교수/김해문화원 향토사 연구원)
신어산(神魚山) ; 김해시 상동면 . 삼방동 . 대동면에 위치 하고 있다,
높이 630m. 금관가야(金官伽倻) 시조 수로왕과 어왕옥(許黃玉) 왕비의 신화가 어린 성산이다. 신어는 수로왕릉 정면에 새겨진 두 마리 물고기를 뜻하며 밀양 만어산(萬魚山;670m) 전설에도 나오는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과 가락국(駕洛國)의 상징이다, 일명 선어산(仙魚山)이라 하며, 동신어산은 동쪽 신어산의 와전이다.
문화재로는 김해 회현리 패총(사적 2), 분산성(사적 66), 수로왕릉(사적 73), 수로왕비릉(사적 74), 구산동 고분군(사적 75), 예안리 고분군(사적 261), 대성동 고분군(사적 341), 구산동 마애불(지방유형문화재 186), 김해향교(지방유형문화재 217), 은하사 대웅전(지방유형문화재 238), 초선대 마애석불(지방유형문화재 78), 숭선전 제례(지방무형문화재 11), 서상리 고인돌(지방 기념물(4), 유하패총(지방기념물 45) 등이 있다.
탐방자료 편집 ; 김우락탐방대장
탐방대원들은 토요일 아침 장유2동 행정복지센터 광장에 모였다.
대청천문화회 하선영회장님의 인사 말씀과 김우락 탐방대장님의 오늘 찾아가는 탐방 코스와 일정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두대의 차량으로 나누어 신어산 은하사로 출발합니다.
대청천문화회 하선영회장님의 인사 말씀과 김우락 탐방대장님의 오늘 찾아가는 탐방 코스와 일정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두대의 차량으로 나누어 신어산 은하사로 출발합니다.
은하사는
영화 [달마야 놀자] 의 촬영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이다.
구야국(拘耶國) 수로왕(首露王:재위42~199) 때 인도에서 온 승려 장유(長遊)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이 시기는 아직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래되기 전이라 확실한 고증은 할 수 없다. 전하는 설에 따르면 신어산 서쪽에서 인도 불교가 들어온 것을 기념하여 이 절을 지었으며, 동쪽에 동림사(東林寺)를 지어 구야국의 번영을 기원 했다고 한다.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고, 1592년(조선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0년대에 중창하였다.
영화 [달마야 놀자] 의 촬영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이다.
구야국(拘耶國) 수로왕(首露王:재위42~199) 때 인도에서 온 승려 장유(長遊)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이 시기는 아직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래되기 전이라 확실한 고증은 할 수 없다. 전하는 설에 따르면 신어산 서쪽에서 인도 불교가 들어온 것을 기념하여 이 절을 지었으며, 동쪽에 동림사(東林寺)를 지어 구야국의 번영을 기원 했다고 한다.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고, 1592년(조선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0년대에 중창하였다.
해은사 수로왕비의 가야 도래와 혼인담
수로왕비와 김수로왕의 결혼과정에 대한 기록은《삼국유사》가락국기와 금관성 파사석탑조에서 더듬어 볼 수 있다.
건무(建武) 24년 (기원 48년) 무신(戊申) 7월27일에 구간 등은 수로왕에게 왕비를 얻을 것을 청하는 말을 올렸다.그러자 왕은 "내가 이 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이었다. 나의 배필도 역시 하늘이 명할 것이니 염려 말라." 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으로 가게 했다.
그때 갑자기 한 척의 배가 바다의 서남쪽으로부터 붉은 돛을 달고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으로 향해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배 안의 사람들이 앞다투어 육지로 내려왔다.
승점에 있던 신귀간이 이를 바라보고는 대궐로 달려가서 왕에게 알리니 왕은 매우 기뻐했다. 왕은 구간을 보내어 그들을 맞이하여 대궐로 모시게 했다. 그러나 배 안의 왕비는 "나는 너희들을 모르기 때문에 경솔히 따라 갈 수 없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왕은 행차하여 대궐 아래부터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곳에 가서, 장막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왕비도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왔다. 그리고 자기가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서 산신에게 바쳤다. 왕비는 여러 사람들과 보화를 가지고 행궁으로 다가가니 왕은 그녀를 맞이하여 장막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야에 오게 된 연유를 수로왕에게 이야기 했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이라고 합니다. 본국에 있을 때 부모님들께서 꿈에서 상제님을 보았는데 상제께서 '가라국왕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보내 왕위에 오르게 했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거라' 라고 하셔서 저를 가락국으로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를 따라 떠났는데 수신의 노함으로 갈 수 없게 되어 다시 돌아가 석탑을 배에 싣고 무사히 여기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왕과 왕비는 두 밤 한나절을 지낸 후 타고 왔던 배를 돌려보내고 대궐로 돌아왔다. 이후 수로왕비는 기원 189년 1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묻힐 때까지 왕의 곁에서 내조를 했다.
백성들은 왕비를 잊지 못하여 왕비가 처음 배에서 내린 나룻가의 마을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 바지를 벗었던 산등성이를 능현(陵峴), 붉은 깃발이 들어왔던 해변을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또 가락국의 질지왕은 452년 왕과 왕비가 혼례를 치른 곳에 왕후사(王后寺)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고려시대에도 매년 7월 29일에 이 지방 사람들은 승점에 올라기서 장막을 설치하고 술과 음식으로써 즐기고 떠들면서 동서로 눈짓을 보내 건장한 인부들을 좌우로 나누었다, 그리고 망산도로부터 말은 육지로 달리고 배는 북으로 옛 포구를 향해 달리게 했다. 이것은 수로왕비가 도착한 것을 왕에게 급히 알리려 했던 유천간의 일을 기리기 위하서였다.
(참고자료 ; 문화콘텐츠 닷컴 문화원형백과)
영구암(靈龜庵)
영구암 사적기에 따르면《영구암(靈龜庵)은 김해의 진산인 신어산(神魚山)에 위치하며, 대한 불교조계종 범어사(梵魚寺)의 말사이다. 전설에 의하면 서기 42년(가락국 수로왕 5) 장유화상이 창건했고, 509년에 중건되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 권 2 <가락국기> 에는 금관가야(金管伽倻)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탄생과 건국, 왕비 허황옥(許黃玉)에 얽힌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허확옥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였다고 하는데 <삼국유사> 권 3 탑상편에서는 그녀가 파사 석탑을 배에 싣고 가야에 왔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허황후의 오빠인 승려 장유화상이 함께 가야에 와서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를 기리키고 불교를 전파했다고 한다. 영구암을 창건했다고 전하는 장유와 같은 사람이며, 김해의 장유도 이로부터 유내된 지명이다. 조선시대 영구암의 연혁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근대기의 중건을 거처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 사찰의 유물로는 고려 후기의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경상남도 문화재) 일부가 남아있고, 20세기 초에 유명한 화승 완호낙현(玩虎洛現)이 그린 칠성탱(경상남도 문화재) 이 있다》 라고 적고 있다.
*영구암의 옛날 이야기*
옛 가야국 500년 역사를 오롯이 담고 있는 김해의 진산 신어산(神魚山) 자락에는 가야국의 불법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신어산에는 많은 사찰들이 있었다. 그 중 신어산의 발원지이며, 신령스러운 물고기가 살았다는 샘이 있던 곳이 바로 영구암이다. 일찍이 가야시대에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 공주가 인연국토에 불법을 전하기 위해 파사석탑을 배에 싣고 아유타국에서 가야국에 도착하여 동행한 오빠 보옥선사(장유스님)가 가락7암으ㅡ 지어 불법을 전파 하였다고 한다 .
분성산성
분성산은 경남 김해시 북부(北部), 삼안(三安), 활천(活川) 3개동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서쪽 사면에서는 해반천(海畔川)의 지류가 발원하고 동쪽 사면에서는 신어천(神魚川)의 지류가 발원한다. 또한 산의 남쪽 산중턱에 분산성(盆山城),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 해은사(海恩寺), 금성사(金城寺), 성조암(聖祖庵) 등이 있으며, 남쪽 기슭에 시가지가 전개되어 있다
김해 중심부의 이 산에는 가야 때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분산성이 위치하며 분산성은 사적 제66호. 산성주위 둘레 약 900m. 산꼭대기에 있는 평탄한 지형을 둘러서 그 주위에 남북으로 긴 타원형을 이룬 성벽으로, 수직에 가까운 석벽은 높이가 약 3~4m인데 무너진 부분이 적지 않다. 이곳에 세워진 ‘정국군박공위축성사적비'에 의하면, 이 산성은 조선 초기에 박위가 고산성(古山城)에 의거하여 수축한 뒤 임진왜란 때 무너진 것을, 1871년(고종 8) 다시 현재의 성벽으로 고쳤다고 한다. 성기(城基)의 선정법은 삼국시대 산성의 주류를 이룬 테뫼식[鉢卷式]을 따른 점으로 미루어 그 시축(始築) 연대가 삼국시대임을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산성 서쪽의 삼산리(三山里)에 있는 고분군의 유적으로 보아, 가야의 중심 근거지를 이룬 산성으로 짐작 된다. 허왕후와 장유화상이 가락국으로 건너와 창건한 해은사, 흥선대원군 만세불망비 등을 모신 충의각, 그리고 분성산 봉수대 등이 산자락 곳곳에 있어 가야의 문화를 느낄 수 있다. 산 정상에 김해천문대가 위치하여 김해시민뿐만 아니라 타 지역민의 명소가 되고 있다.
출처 ; 김해시청 홈페이지=>김해의 관광명소
김해 중심부의 이 산에는 가야 때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분산성이 위치하며 분산성은 사적 제66호. 산성주위 둘레 약 900m. 산꼭대기에 있는 평탄한 지형을 둘러서 그 주위에 남북으로 긴 타원형을 이룬 성벽으로, 수직에 가까운 석벽은 높이가 약 3~4m인데 무너진 부분이 적지 않다. 이곳에 세워진 ‘정국군박공위축성사적비'에 의하면, 이 산성은 조선 초기에 박위가 고산성(古山城)에 의거하여 수축한 뒤 임진왜란 때 무너진 것을, 1871년(고종 8) 다시 현재의 성벽으로 고쳤다고 한다. 성기(城基)의 선정법은 삼국시대 산성의 주류를 이룬 테뫼식[鉢卷式]을 따른 점으로 미루어 그 시축(始築) 연대가 삼국시대임을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산성 서쪽의 삼산리(三山里)에 있는 고분군의 유적으로 보아, 가야의 중심 근거지를 이룬 산성으로 짐작 된다. 허왕후와 장유화상이 가락국으로 건너와 창건한 해은사, 흥선대원군 만세불망비 등을 모신 충의각, 그리고 분성산 봉수대 등이 산자락 곳곳에 있어 가야의 문화를 느낄 수 있다. 산 정상에 김해천문대가 위치하여 김해시민뿐만 아니라 타 지역민의 명소가 되고 있다.
출처 ; 김해시청 홈페이지=>김해의 관광명소
탐방후 시원한 국수와 동동주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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